YouTube Transcript:
[16/07/31] 김양재 목사 - 돌탕집탕(눅15:11-32)
Skip watching entire videos - get the full transcript, search for keywords, and copy with one click.
Share:
Video Transcript
View:
예. 굉장히 성경에 누구나 다 하는
본문인데에 이제 주일 예배 한 번도
안 한 거 같아서 좀 다루려고
합니다. 오늘 돌탕 집탕하니까 돌탕이
삼계탕인가 오골계 탕인가 하는 분도
여기 정말 계세요. 전혀 이렇게
모르시는 분들도 많이 계시는데 오늘은
성경에서 가장 유명한이 돌아온 탕자
얘기를 하려고 합니다. 지난주 복이
있도다의 설교는 이제 영혼 구원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교회로 나라로
지경이 넓어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구원을 위해서 포도나무처럼
아무리 잘 밟히고자 해도 그 오늘
본문은 한 영혼을 돌아오게 하는 것은
인간의 노력만으로는 참 어려운 것을 보여주는
보여주는
본문입니다. 내 집에서 이렇게 잔치를
하는데 가난한 자들, 몸 아픈 자들,
다리 저는 자는 청하기가 어려운 것인간의
것인간의
본성이잖아요. 그래서이 갚을 것이
없는 사람을 어떻게 청하고
싶겠습니까?이 이 15장 앞장인
14장에 봐도 청하는 일차 대상이
소사고 바사고 장가든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보기에 편안해 보이고 행복해
보이는 사람을 먼저 청합니다. 그러나
날마다 이렇게 말씀의 잔치를 베풀고
청해도에 그들과 비슷한 유대인 서기관
바리새인들은 한결같이 사용하면서
이유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들이에
이렇게 사용하니까 갑작스럽게 가서
이제 가난한 자, 몸 불편한 자, 맹인
맹인
전어자마자 달려옵니다.
복음에는 차별이 없지만 이렇게 조금만
먹을 것이 있으면 한결같이 사양을
하기 때문에 환경을 통해서 어쩔 수
없이 매달리게 하시고 부르십니다.
강권에서라도 어 채우라고 하셨으니
이렇게 강건해야 될 사람도 있지만 어
이렇게 한결같이 사양하는
사람들에게서는 지금은 떠나야 될
시간이에요. 이걸 분별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에 주제는
회개 더 중요하지만은 누가 초청을
받아들이는 진정한 의인인가 그
시각으로 제가이 탕자의 비유를 좀
보려고 합니다. 주님은 100마리 양
중에서 건강한 아홉 마리보다 이른양
한 마리를 이제 귀하게 보시고 열
드라크마 중에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에
관심이 있으시고 이제는 범위를 좁혀서
두 아들 중에 탕자인 아들을
찾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그 유명한
돌아온 탕자 집에 있는 탕자의 본문을
통해서 한 영혼을 찾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기 원합니다.
첫째로 돌아온 탕자입니다.
11절입니다. 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도와들이 있는데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제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본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그후 며칠이 안
돼요.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라에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둘째 아들은 아버지가 계신 집안에서의
삶보다 다른 곳에 가면 큰 만족이
있으리라고 생각을 했어요. 틈만 나면
그래서 나름대로의 계획을 세우고
아버지를 떠나 내 뜻을 펼치의
마음대로 살아보는 것이
소원이었겠지요. 그러니까 아버지만
보면 짜증이 나고 숨이 막혔을 것이고
아버지의 걱정 말들이 들리지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아버지는 어서
빨리 죽어야 되는 존재였을 것입니다.
당시 상속 절차에 의하면 둘째 아들은
1분을 받고 큰 아들은 1분을 받게
되는데 아버지가 살아 있을 때 받으면
다시 그곳에 1분의만 받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생전에
유산을 물려 주었다고 해도 아버지가
살아 있는 동안 자식은 유산에 대한
소유권을 소유권만 가질뿐 처분권은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둘째 아들은 유산에 19분의밖에 못
봤는데도 죽지도 않은 아버지에게
유산을 달라고 땡깡을 부린 것입니다.
자신의 주제도 모르고 제대로 된
유산이 아니어도 된다. 내놓으라.이 당연하듯이
당연하듯이
요구합니다. 살아 있는 아버지에게
유산을 요구한 것은 그 당시 관습으로
볼 때 도덕적으로
용납되기 어려운 지극히 무례한
것이었습니다. 아버지를 죽인 죽은
것이나 다름없이 취급한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아버지의 권위를
철저히 짓밟고 집안의 명예를 더럽힌
이런 놈은 단지 한 집안의 문제가
아니라 마을 어른들이 함께 치리해야
할 공동체의
문제로서 어 이런 자식은 마을
사람들이 뺨을 때린다든지 가족
구속원의 자격을
박탈한다든지 더 극단적인 경우 아들을
죽은 것으로 여기고 장례식을 치를 수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에게
유산을 물려 줍니다. 수치를 안겨 준
아들에 대한 응징이 아니라 본인이 그
응합니다. 재물을 다 모아서 갔다는
것은 돌아올 생각이 없었음을 알 수
있어요. 부동산을 현금으로 바꿔서
갔으니까 땅도 다 팔아서 간 거예요.
고향 땅이고 뭐고 다 싫은 거예요.
찾지 못할 먼 나라로 갔다는
것은 무슨 상처가 있었는지 할 수만
있으면 가족 가족의 연을 다 끊어
버리고자 한
것입니다. 이렇게 둘째 아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이 아니라 자기
부르심으로 떠났기에 자기 소견에
오른대로 행한 그에게 무슨 선한 것이 있었겠습니까?
있었겠습니까?
허랑방탕으로 줄다음질칠 수밖에
줄다음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재물에 성경적인 가치관이
없었기에 며칠이 못 다 없셉니다. 몇
대가 부자여도 돈 들어 먹는 건
순식간입니다. 열등간 많은 사람은
돈밖에 자기를 치장할 거리가 없기에
오직 돈만 요구하고 돈으로 해결하고
돈 가지고 자랑합니다. 그렇게
무리하게 재물을 요구했던 당자의
마음속엔 근본적으로 열등감의 문제가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여기
호랑방탕하여는 구원받지 못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많은 돈
때문에 좀 풀리는 듯했지만 잠시 후에
재물과 사람 모두에게 배반을
당합니다. 아들의 잘못된 동기를 잘
알면서도 허락한 아버지의 마음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아닐까
싶습니다. 로마서 1장
28절처럼 상실한 마음대로 버려
두시는 하나님의 마음을에 생각할 때에
그들이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어요. 그래서이 아버지는 돌아온
탕자의 과정을 겪어야 되는 거예요.
겪어야함을 아는 것이에요. 그러니
사랑은 재물을 낭비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적용해 보세요. 어떤
부분에서 신앙도 가족도 다 끊고 내
뜻대로 어 하고 싶은 강한 욕망이
있습니까? 그 욕심 때문에
허랑방탕으로 갈 수밖에 없었던 사연이
있습니까? 그 사연이 누구의 탓도
아닌 무분별한 내 삶의 결론임을
깨닫고 있습니까?
14절입니다.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불로서 비로서 궁핍한지라.
궁핍한지라.
그래서 아들도 아버지 입장에서도 다
없앤 후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든 것은
징벌입니다. 그가 이상향으로 생각하고
온갖 즐거움과 자유를 누리고자 갔던
그 나라의 흉년이든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허랑방탕도 한목했지만
결정적인 것은 나라님도 막을 수 없는
흉년인 것입니다. 우리 집에 징벌이
온 것, 흉년이든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비로소 궁핍하기를
하나님께서 기다리시기 때문입니다.
궁핍이 인생의 약이기 때문입니다.
눈물 젖은 빵을 먹어 보지 않고는
인생을 논할 수가 없습니다. 나의
잘못된 결정 때문에 그 나라까지
흉년이 들 수 있습니다.
15절입니다. 가서 그날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사니 그가 그를
들러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그가
돼지 먹는 지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하지만 처음 경험해 보는 비로소
궁핍한 것 가지고는 낮아지지
않았어요. 돼지 치는 것까지 갔어요.
그것도 안 됐어요. 돼지 먹는 지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했어요. 그것도
아직 안
낮아졌어요. 지염 열매도 없어서 못
먹게 되는 데까지 가게 돼야 돼요.
여기까지 가야 됩니다. 뭐라고요?
비로써 궁핍의 돼지기에 지염 열매
그것도 없는 거 내려가야 합니다.
사실 우리는 자식 도와주는게 뭔지
모릅니다. 돈으로 도와주는게 도와주는
건지 잘 모르겠어요. 굳어났을 때
책임을지고 감옥에 가면 사람이
됩니다. 이번 주일에도 정말 죽겠다고
오신 분이 계세요. 그래서 제가 감옥
가시라고 그랬어요. 감옥 가시면
된다고. 우리들 교회 감옥 가신 분
많다고 그래서 오늘 꼭 오라고 제가
말씀드렸는데 오셨을 줄 믿습니다.
그런데 연민으로 자꾸 도와주면 한
사람 망할 것 사람 20살 100
사람이 망합니다.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어야 올라올 일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전재산이 허이 돼서
구원이 된다면 그 편을 택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아들이 너무 돈을
좋아하고 쉽게 써 버리니까 그
아버지가 절대로 저 아들에게 돈을
주면 안 되겠다고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급해진 아들이 아버지한테
전보를 쳤어요. 당신의 아들이 굶음
이렇게 보냈습니다. 그랬더니 아버지가
답장을 하기를 굶어 죽어라. 에비
이렇게 보냈습니다. 그때부터
아들이악물고 돈을 벌었습니다. 그리고
20여년 동안 아버지에 대한 상처로
연을 끊고 지내다가 어느 날 성공을
했어요. 아버지의 사랑을 깨닫고
고향에 찾아갔습니다. 그랬더니
아버지가 1년 전에 돌아가셨다는
거예요. 그리고 편지를
남기셨어요. 거기에는 아들아 내가
하루도 너를 생각하지 않을 데가
없었다. 네가 정신 차리고 잘 살기를
바래서 그런 답장을 보낸 것이다.
그런데 네가 안 찾아오는 것을 보니
잘 살고 있는 것 같아서 도리어
다행이다. 하루도 너를 위해 눈물
흘리지 않은 적이 없었단다. 이것이
아버지의 마음이 아닐까 싶습니다.
스스로 가난하기를 청하는 자 외에는
모두 가난을 수치로 여깁니다. 가난을
수치로 여기니까 큐티하면서도 되는
일이 없다고 합니다. 나는 예수 믿기
때문에 살면서도 기쁘다고 자랑으로
여겨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수치로
여기는 것이 우리 믿음의
한계입니다. 가난한 것이 수치스럽고
그것 때문에 주눅이 든다면
징벌입니다. 징벌에서 아직 구원받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책임을 물으시는
겁니다. 이런 사람은 고향에 있으면 금세손을
금세손을
벌렸을테니까 먼나라에 가서 허의한
것이 잘된 일입니다. 그래서 스스로
돌이킬 때까지 기다리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여러분 한번
적용해 보십시오. 비로소 궁핍한
단계, 돼지 치는 단계, 돼지 먹는
쥐염 열매 먹는 단계, 지염 열매도
없어 못 먹는 단계 중에 나는 어떤 단계에
단계에
있습니까? 여러분 이렇게 낮아지셨습니까?
낮아지셨습니까?
17절입니다.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끈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줄여 죽는구나. 너무도 치사하지만
배가 고픈 거예요. 이제 내가 밥
먹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라도 이제
한다요. 여기까지 가야 됩니다. 이제
원망도 욕심도 허풍도 다 없어지고
자기 아버지 집에 품꾼이 굶지 않는게
너무 부러운 거예요. 여기까지 가야
돼. 큰 아들하고는 감히 이제 비교도
안 합니다. 이렇게 내려가세요. 자기
주제를 알게 됩니다. 여러분은 그저
굶지 않는 것을 부러워할 정도의
치사함과 배고픔을 겪어
보셨습니까? 요즘 누가 부럽습니까?
잘 사는 친척 동창이 부럽습니까?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날에 인생을
생각할 때 감히 지금 누구를 부러워하겠습니까?
부러워하겠습니까?
내가 내 주제를 아는 것부터가
하나님의 시작입니다. 18절입니다.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죄를
지었사오니 떡을 갖다 줘서 회개하는게
아니에요. 고난이 있으니까 그것도
먹을 것이 하나도 없으니까 그 유명한
100% 죄인이 저절로
깨달아졌습니다.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가 그래서 나옵니다. 심령이
가난한게 아니에요. 마가복음에는 그냥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
그랬어요. 가난하니까 자기 죄를 보게
됐습니다. 자기 죄를 깨닫지 못하면
원망만 합니다. 그 사람이 날 꼬여서
망했어. 투자하라고 해서 했더니
망했어. 이민노라고 해서 날 속였어.
갔더니 망했어. 돼지 주인이지 열매를
준다고 하고 사기쳤어.
이러면서 원망을 합니다. 죄의 특징이
원망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망하고
쫓겨나는 힘든 사건에서 하늘 아버지께
하늘 아버지께 지은 나의 죄를
깨달아야 합니다. 누군가를 탓하고
사회를 탓하면서 또는 스스로를
책망하면서 회개가 아닌 후회와 원망만
품고 있지는 않습니까?
19절입니다.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자기 죄를 보게
된 둘째 아들은 자기 주제를 알게
되니 아들로 불릴 자격이 없는 자신의
모습을 통감합니다. 이전에는 자기가
대단한 사람인 줄 알고 아버지께
당당하게 가서 내 몫을 내놔요. 했던
둘째 아들이 나는 아버지의 아들이 될
수 없는 사람입니다.
풍꾼에 하나라도 일걸음을 감당치
못하겠다고 고개를
숙였습니다. 참 회개의 모습이 바로 이런
이런
겸손함입니다. 내가 죄인이라는 그
깨달음이 우리를 성숙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이 세상에 가장 좋은
감정이 회개의 감정입니다. 가장
멋있는 감정도 회개의
감정입니다. 우리가 립서비스로
사랑한다. 이런 얘기 100번보다도
내가 죄인이다라는 고백보다 감동을
주는 언어는 없습니다. 그 언어가 상대방을
상대방을
변화시킵니다. 내가 살고 나 때문에
힘들었던 사람들까지 사는 길은 내가
회개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20절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치인이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죄를 미워하면서 청산하지 않는 것은
회개가 아닙니다. 마음 먹었으면
행해야 합니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주님은 벌써 아시고
아직도 거리가 뭔데 측인이 달려 안아 주십니다.
주십니다.
치인이 여겨는 우리 말에 애관장이
녹는다 이런 표현이에요. 창가 상할
정도로 애뜻한 마음을 뜻하는
단어예요. 여러분, 여기서 누가 가장 아팠을까요?
아팠을까요?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보다 아 더
아픈 사람이 없어요. 아들이 그렇게
사는 동안 아버지는 늘 동구박 나가서
아들을 하염없이 기다렸을 것이에요.
사실 아버지는 집으로 돌아오는 아들을
집안에 드리지 아니하고 제의 대가를
너 치어야 한다. 네가 변했는지
보겠다면서 공개적으로
창피를 줄 수도 있었습니다.
둘째 아들은 그런 수모를 당해도
마땅하지 않습니까?
아직 거리가
뭔데도 저 멀리서 아들이 돌아오는
것을 보았다면 분명 그 시간은 밤이
아니고 낮였을 거예요. 근데 그
시간대라면 마을에 많은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고 아들을 알아본 사람들에
의해서 어떤 수치를 당할지 모르는
거예요. 혹시라도 그럴까 봐 아들이
돌아온 것을 보자마자 아버지는
쏜살같이 달려 나가는 거예요. 달려가다로
달려가다로
번역된 헬라오 트레코는 경기장에서
육산 육상 선수가 전력 질주하는
모습을 묘사하는데 사용된 단어예요.
고린도전서 9장 24절의 운동장에서 다름
다름
질환 그냥 간게 아니고 손살같이
달려갔어요. 나이도 많은 사람이
채통이고 뭐가 없이 명예와 채통을
목숨보다 더 소중히 여기던 당시
문화에서 아버지의 이런 행동은
파격적이고 수치스럽기까지 한
행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서 명예와 체외면
자존심을 모두 버렸고 아버지로서
행사할 수 있는 최소한의 고난마저
포기했습니다. 자식이 그 어떤 위해와
멀지를 당하지 않게 하려고 아들의
수치를 자발적으로
떠났습니다. 아버지의 자발적 수치가
아들을 살린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아들이 회개했기 때문에 받아
준게 아니에요. 여러분들 오늘 잘
들으셔야 돼요. 탕자가 회개했기
때문에 받아 준게 아니에요. 언제나
그 자리에서 있는 분이 아버지예요.에
에 아들이 변에서 돌아왔지만 아버지는
이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동일한
마음으로 아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고통이며 기다림인
것입니다. 집을 떠나기 전 아들에게
아버지는 하나의
방해물이었을뿐 아들은 마치 고아처럼
살았어요. 그러나 낮아진 마음으로
회개하고 돌아왔을 때 그때서에 비로서 아버지를
아버지를
얻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에게
잃어버리니 아버지를 돌려 주기 위해서
아버지는 이을 악물고 아들을
떠나보냈고 재물을
허위했습니다. 21절입니다.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즐거워하더라
둘째 아들은 마음속으로 회개 한 것을
아버지에게 입으로 시인했습니다.
회개는 이렇게 언어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다들 말로 해야 하냐?
그렇습니다. 말로 해야 합니다.
사랑이 차 있으면 말을 안 할 수가
없습니다. 말을 절대로 안 하는 사람
아직 회개가 안 된 것입니다. 회개는
옆 사람들에게 감동과 은혜를
끼칩니다. 나 혼자 회개는 없습니다.
집에 들어온 아들은 이제 아버지
집에서 일하는 품꾼들 중 하나가 될
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집에
돌아와서 알게 된 것은 아무것도
자기를 아버지의 사랑에서 분리할 수 없었다는
없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한없는 사랑에서
비롯한 아버지의 용서로 그가 온갖
비행을 저지르고 돌아온
탕자였어도 고용된 품꾼이 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죄를 짓거나 안 짓거나 영원한
아들이었습니다. 아들에게 아버지는 깊
아낌없이 기쁘게 재물을 씁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고기한 신분의
사람임을 공개적으로 알리기 위해서 예
제 먼저 제일로 좋은 옷을 입혀서
신분을 회복시켜 주셨어요. 정말 의의
옷을 입혀 주셨어요. 그 주인으로서
갖는 권위를 상징하는 인장반지
가락지를 손에 끼우고 종이 아닌
집주인으로서 자유로운 신분을 상징하는
신을 신겨 줍니다. 특별한 날 잔치를
베풀 때내어 놓았던 살진 송아지를
잡은 것은 아버지에게 그만큼 특별한
날이었다는 것입니다. 너는 그만큼
특별한 아이란다. 너는 함부로
살아서는 안 되는 아이란다.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은
낭비처럼까지 보입니다. 너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했을 때 나를 안아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 가족과 지체의
사랑은 바로 이와 같습니다. 내가
미쳐 고백하지 못하고 회개하는 마음만
먹어도 나를 축복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시고 진정한 그 회개에 이르기를
간고하기 바랍니다. 적용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나를 돌아온
탕자처럼 귀하게 여기신다는 것이
믿어지십니까? 여러분은 돌아갈 곳을
생각하면 아버지의 얼굴이
떠오르십니까? 현재 아버지의 품속에 안겨
안겨
있습니까? 예. 오늘마다 다 적용을
해야 될 것인데 여러분들이 너무
힘들까 봐 예 그냥 알아서 적용을
이렇게 골라내시기
바라요. 예 그런데 오늘 이런
이야기를 듣고 전혀 기뻐하지 않는 한
사람이 있으니
마아들이었습니다. 자, 두 번째는
집에 있는 탕자 얘기입니다. 저는
오늘이 집에 있는 탕자가 참 문제라는
생각을 하면서 여기에다 초점을 더
맞춰서 설교를
준비를 했습니다.
25절입니다. 마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둘째 아들 표현에
의하면 내 아버지 집에는 품꾼이
많은데 동생보다 많이 받은 마다들이
풍꾼들과 같이 밖에 나가서 일했다니
너무 성실하고 근면한 사람 같아요.
자기를 스스로 열심히 하니 열심히
살지 않고 노력하지 않는 사람을
이해하기 어려운 성격이었을 것이 또
아버지로부터 받은 유산도 많으니
남에게 아쉬운 소리를들을 것도 없고
또 이제 할 것도 없고 손가락질 받을
일도 없는 사람인 거예요. 그런
마다들이 그 사람들하고 같이 나가서
일까지 하니 이제 하루의 일가를
마치고 일터의 현장님 밭에서부터
집으로 돌아오고 있는 중입니다. 귀를
울리는 풍료와 춤추는 소리에 마다들은
의아해야 합니다. 26절입니다. 한
종을 불러이 무슨 일인가 물은데
아버지와 같이 살아도 아버지에게 직접
묻지 않습니다. 뒤에 나오면은 뒤에
나오는 거 보지만은 어이 바다들은
아버지가 아니고 종이기 때문에 거긴
상관이고 여긴 종이니까 그만큼
아버지의 거리를 두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원하는 것에 관심이 없어요.
그래서 종을 불러서 무슨 일인가
물었습니다. 무슨 일인가 물은 것도이
시제로 미완료 시제라고 이해가 안
되는데 계속적으로 지속적으로 이해가
안 되는 사람이에요. 여러분들 그
성실한 사람이 우리 교회에 계속 아주
지속적으로 이해가 안 됩니다.
13년으로 온이 똑똑한 분이
지속적으로 이해가 안 돼서 지금도
목장이 안 나가고 계어요. 예.
그분이 에스대 출신이에요. 지속적으로
제 설교가 이해가 안 돼요.
지속적으로. 예.
그 왜냐하면이 모든 사람들의 간증이
내 일이 아니기
때문이에요. 탕자의 간증이 나하고
상관이 없어요. 어 저거는 저 찌질한
인간들이나 저러는 거야. 이렇게
생각할 수 있죠. 그리고 이제 그
사람이 변화의 세 사람 된게 나하고
뭔 상관이야. 예. 이게 맞아들입니다.
맞아들입니다.
27절입니다.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도료 종이
작은 아들을 염려했던 아버지의 마음을
더 잘 알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마다들은 종보다도 아버지의 마음을 더
모르고 있습니다. 집안의 종보다
남보다 못한 가족입니다. 여러분은
부모님의 배우자, 부모님과 배우자
자녀가 어떤 일에 기뻐하고 슬퍼하는지 알고
알고
있습니까? 그걸 꼭 말을 해야
아느냐고 하면서 외면하지는
않았습니까? 그러면서 나를 몰라
준다고 원망하며 고독케 하지는 않습니까?
않습니까?
자,이 얘기를 듣고 28절에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난되 함께 즐거워할 것을 당연히
기대했는데 마다들은 오히려 분노로
반응합니다. 그의 아버지가 무책임한
행동에 대해 동생을 벌어지 벌하지
않은 것에 붕괴합니다. 게다가 그가
환대를 받고 그의 행동이 너그럽게
용서한 받았기 때문에 더 화를
냅니다. 요즘 분노 장애를 갖고 계신
분들이 목장마다 계시던데 노가 쌓여
있으면 혈기가 충동적으로 나와서 가족
관계를 비뚤어지게 합니다. 한 사람의
분노가 그렇게
심각합니다. 그래서 마아들 둘째 아들
즉 탕자와 모범생이 예수가 없습니다.
똑같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차별 없이 권해야 합니다. 적용해
보세요. 큰 일이든 작은 일이든
매사에 오해하고 분노하는 자녀와
배우자가 있습니까? 거기에 혈기로
대응하지 아니하고 끊임없이 권하며
인내하는 사랑이 있습니까?
29절입니다.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에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 하나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리게 하신 일이
일이
없더니 여기서 아버지를 섬겼다고 할
때 섬기다는 원어를 보면
돌려오라고 자식으로서가 아니라 종으로
섬겼다는 표현이에요. 자신과 아버지의
관계가 부자 관계가 아니고 주인과
종의 관계로 인식하고 그렇게 살아왔음을
살아왔음을
드러냅니다. 그렇게에 그런 식으로
여러에 섬기고는 겨우 바라는게 염소
새끼를 바았습니다. 아버지가 그렇게
사랑했는데 사랑의 사랑으로 응답하지
못했습니다. 아버지가 사랑한다고
하는데 거기는
충성한다고 어 반응한 것은 사랑에
대한 모독입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그러는데 저는 충성하겠습니다.
모독입니다. 사랑에 대한 그래서 이게
앞부분을 원어로 보면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다음에 아버지를 룩
이거는 아버지 보고 이바요 이런
거예요. 이런 식으로
불렀습니다. 아버지를 사랑같이
여기지도 않아요. 여러분이 나이가
들어서 부모님께 입요 야 이러는 분이
있다면 자 빨리 호칭부터 바꾸시길
바래요. 아무리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자식이라고
자식이라고
할지라도 예 호칭부터 바꾸셔야
합니다. 둘째 아들이 9분을 가지고
나갔으니까 이제 나머지 9분의 자기
것이 될 거라고 회심의 미소를
지으면서 더욱 봉사를 하면서 충성의
열을 냈어요. 근데 둘째 아들이
돌아오기 전까지는 기쁨이 충만했는데
이제 자기 몫이 없어지게 됐어.
아버지를 존경한 것이 아니라 돈을
존경하고 눈치를 본 것입니다.
아버지에게 잘 보여야 돼서 풍악과
춤추는 소리 함께 즐길 줄도 모르는
정말 절벽 같은 매력이 꽝 매력이 없는
없는
사람입니다. 정리하자면 마다들은
열심으로 종과 같이 아버지를 섬김으로
아버지의 호위를 살 수 있고 자식의
신분을 유지해 나갈 수 있다고 오해한 것입니다.
것입니다.
형제 누구 때문에 내가 손해를 받다고
내가 우리 부모 때문에 하고 싶은
것을 못 했다고이 분해하는 것이
바로이 마다들과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내가 정말 사랑해서 했다면 그것
자체가 복입니다. 그게 내 복이에요.
사랑없이 수고하고 칭찬과 물질에
보답을 바라는 것은 제일 하위 개념이
가장 하위 생생 내시는 것은 그 내가
좋아서 하는 거보다 기쁨이
어디겠어요? 자,
30절입니다.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리니 아이
아들이 돌아오며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맞습니까? 아버지한테
아버지한테
되들었어요. 근데 여기서 마다리 자기
동생을 내 동생이라고 안 합니다.
오히려이 당신의이 아들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우리가 보통이 니은 저
니은 하는 거보다 훨씬 더 나쁜
욕입니다. 마다들은 방탕했던 동생을
정제하고 무시하고 감싸 주기보다는
아주 관계를 지금 끊고 싶은 것으로
보입니다. 받아들이라고 창녀들과 놀고
방탕하게 살고 싶은 마음이 없었겠습니까?
없었겠습니까?
그에게는 둘째 아들에게는 없는
근면함과 성실함이 있었습니다.
따라가지 못할 자기 수양과 영성이
있는 것 같지만 실상은 의로운
교만으로 서운함과 분노 가운데
아버지는 없고 오직 자신을 몰라주는
불공평한 불공평한 늙은이만 거기
있었습니다. 여러분 회개 전에 예
둘째 아들도 그랬잖아요. 아버지는
죽었으면 좋겠다.이 이 아버지는
너무나 믿음이 있지만 둘째 아들,
첫째 아들이 전부 다 지금
불려자입니다. 주님을 만나지
못했어요. 얼마나 외로운 인생길를 걸어갔겠습니까?이
걸어갔겠습니까?이
이 마다들은 피의 의식으로 스스로를
상처 주며 나올러 외로워하고 있습니다.
있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 마음속에 감춰진
모습이 완전히 다릅니다. 마다들은
자신과 동생을 비교합니다. 예.
그 둘째 아들은 두지 아들은 또
마다들 비교하고 나가고이 마다들은에
뭔가가이 그 두째 아들한테 자기한테
없는게 있었던 거 같아.
착한 아이 증후근에 가는 글을 하나
읽었습니다.이 자존감이 낮은 착한
아이 증후근에 속한 사람이에요.
그니까 어려서부터 말 잘 듣고
순종적이며 자기 주장이라고 전혀
없어서 다루기가 편하니까 착한
아이라고 하는
것뿐이에요. 성도 자녀와 목회자
자녀가 싸우면 목회자들은 무조건 자기
자녀에게 사과하라고 말합니다. 이때
아무런 정황이나 반발 없이 사과하는
아이를 착한 아이라고 합니다. 그
아이가 왜 사과해야 되는지 그런 거
생각 안 합니다. 너는 목사들이니까
무조건 사과해. 저도 그러거든요.
너는 할머니가 목사니까 무조건 잘못됐다
잘못됐다
그래요. 예. 그렇게 하다 보니까 문제가
문제가 생기더라고요.
생기더라고요.
예. 그러니까 자기는 잘못하지
않았는데 무조건 우리 아버지가
목사니까 나는 사과해야 돼. 이런게
쌓이다 보니까이 속으로 부글부글
끌어서 목사 자녀들이 정말 많은 시행
착오를 겪지
않습니까?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
마음속에 감춰진 모습이 완전히
다릅니다. 진짜가 아니라 가짜입니다.
원본이 아니라 복사본으로 삽니다.
자기가 없는 삶에 그 구체적인
증상들이 다 거 같아. 남의 눈치만
살피고 싫어 못 하고 겉과속이 다른
가면을 쓰고 참고 또 참고 하고 싶은
일이 없고 스스로 결정을 못 내리고
스스로를 부정적으로 생각하며 피의
식에 젖어 있어요. 이렇게 섬김을
받았기 때문에 유약하고 무기력합니다. 늘
늘
우울합니다. 적용해 보세요. 여러분은
착한 아이
컴플렉스입니까? 진짜 착한
사람입니까? 예. 정말 이걸 보니까
저는 돌탕이 아니고
집탕이더라고요. 아 정말 99%도 아니고
아니고
집탕이더라고요. 정말
내가이에 그
나를에 살아내기 위해서 이렇게
착실하게 사른게 아닌게 아닌가?
여러분들께 분노했다는 얘기가요. 앞에
돌아온 탕자에게는 그런 얘기가
없어요. 근데이 집안의 탕자 똑똑한
마다들에게는이 분노가 있어요. 분노가
있어요. 더 나쁩니다. 정말 어쩌면이
큰 아들 때문에 작은 아들을 떠나
보냈을 수도 있습니다. 왜냐면
안타깝게도 마다들은 너무나 회개를
모르죠. 자기가 보기에 별 잘못이
없거든요. 방탕하고 무책임한 동생이
도무지 용서가 되지 않아요. 내가
용서를 받아본 일이 없으니 용서해 줄 일도
일도
없습니다. 근데 큰 아들이 모르는
비밀이 있죠. 예. 지금 미쳐 깨닫지
못하는 것은 자기 동생은 풍류와
춤추는 소리로 가득찬 아버지의 집안에
들어가 있지만 자기는 아직도 집밖에서
있잖아요. 그죠?
우리는이 큰아들이 모르는 비밀은
우리는 죄를 지어서 죄인이 아니라
애초의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짓는 거야.
거야.
그 작은 아들을 보니까 차라리 큰
아들도 허랑방탕과 돼지 우리를
거쳤다면이 회개의 길과 회개의 눈물을
경험하지 않았을까 하는 안타까움이
생기게 되는 거예요. 31절입니다.
아버지가 이르되 예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을되 내 것이 다 내
것이로되이 내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면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라 방탕한 둘째 아들은 아들을
만나 준 아버지는 지금 상황 감정과
불만으로 뒤틀린 마다들에게도
찾아갑니다. 분이 나서 거칠러지는
마다들에게 아버지는 예 하고 부드럽게
불렀습니다.이 이 아들이 아니고네
동생이다. 그리고 너는 나와 항상
함께 있으니 내 것이다. 내 것
아니니? 아버지의 소유가 다 자식을
위한 곳이로되 아버지는 그거보다는
함께 있는 아들이 너를 원한다.
아버지의 마음이 거기에 있는 거예요.
아버지가 마다들에게 가장 원한 것은
원한 것은 품꾼도 많은데 네가 나가서
일하는게 아니라 동생 찾아오는
거였다. 음. 배신한 동생이기 때문에
참아 찾아오라고 말을 못 하지만
날마다 아버지가 나가서 기다리는데 그
일을 안 하는 거예요. 제가 교회를
하면서 가장 기쁜 것도 여러분들끼리
사회 좋게 지내는 거예요. 이은양 한
사람 찾아오는 이야기를 들으는게 가장
기쁜 거예요. 산으로 들러 다니는게
기쁨이 아니라 아버지도 그렇게 동생
찾아오기를 바랬을 텐데 왜 너는
나가서 일만 하냐?이 이 얘기가 안
들리는 거예요. 마다들에게는 밥을
누가 먹겨 줘요? 가만히 하늘만
쳐다보고 있으면 돈이 나와요. 이러는
거예. 하나님은 잃어버린 아들딸
때문에 지금도 고통받고 계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고통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랑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사랑하시고
사랑 때문에 아파하십니다. 그리고
하염없이 기다리십니다. 이것이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잃어버린 아들을 되찾는 비유 가운데
보여 주시는이 죄인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모습과 불교에서 죄인을
다루는 방법과의 대조를 보여주는 예
하나를 들려 드리겠어요. 우리는
탕자라 그러는데 여기는 방자라
그래요. 한 방자가 집을 떠나 오랜
세월 허랑방탕하다가 완전한 거짓꼴이
돼서 고향으로
돌아왔어요. 근데 너무나 처절한
고생의 연속이었기 때문에 심지어
아버지의 모습도 분간할 수 없을
지경이었어요. 근데 아버지는 아들을
딱 알아봤어요. 종들을 시켜서
저택으로 데리고 와서 깨끗하게 목욕을
시켰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자신이
아버지임을 밝히지 않고 아들의 반응을 취깊게
취깊게
살펴보았어요. 그 아들이 점점
책임감이 있는 사력깊은 또 도덕적인
사람으로 변해 갔어요. 그래서 아들의
변화에 만족한 아버지는 드디어 내가네
아버지다 밝히고는 공식적으로 그
아들을 자기의 친하들이요 상속자로
받아들였습니다. 이거하고 탕자의
비요하고 비교되는 거
알았습니까? 알았어요. 뭘
아시겠어요? 고개를 몇 사람 밖에
끼덕거리지 않아. 여기서는 은혜라는
개념을 찾을 수가 없는 거지요.
이것이 행위로 인한 대표적인
가르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마다들이 좋아할
비유입니다. 우리가 살펴본 돌아온
탕자 비유의 궁극적인 주제는 탕자가
아니라 우리를 찾으시는 하나님이시며
인간의 불성심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입니다. 예.이 이 궁극적인
비밀은 아버지의 집이 있기에 우리가
모두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죄인들의 관계에
대한 가장 중요한 원리를 예수님께서이
비유를 통해
제시하셨어요. 하나님께서 우리가 아직
죄인일 때 회개하기 전에 이미 죄인을
사랑하시며 바로 이와 같은 하나님의
사랑이 죄인들의 회개를 가능케 하신
것입니다. 그가 회개했기 때문에
받아들인게 아니고 무조건
받아들였어요. 그니까 아버지에 대한
오해, 그 결과로 인한 자신에 대한
오해, 또 그 결과로 인한 동생에
대한 오해가 이제 마다들의 머리와
가슴을 가득 채우고 있는 거예요.
아버지를 상관으로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게 마다들의 판단은 아버지의
판단에 동의할 수 없고 마다들의
감정은 아버지의 감정을 공감할 수가
없는 거예요. 이런 오해의 뿌리에는
은혜의 개념에 대한 이해가 없는
거죠. 은혜란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거져
주시는 선물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은혜의 하나님이신 거예요. 아버지의
은혜를 이해하지 못했던 마다들은 지금
몸 밖에서 서성거리는 탕자 누릇을
하고 있는 거예요. 아버지께서는
마다들도 당신의 넓고도 푸근한 가슴
속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신다는
거. 그니까 마다들에 대한 것은
우리에게 공이 넘어갔어요. 성경에서는
마다들은 구원받았다는 소리가 없는
거잖아요. 그 저는 오늘이 본문에서
너무 마다들에 대한 애통함이 있는
거예요. 진짜 중요한 거는 잃어버린
그 한 영혼 한 드라크마이 탕자가
아니라 거기 아은 아물의 영혼
아홉드라크마이 집에 있는 탕자가 진짜
중요하고이 사람들이 유대인이고
바리새인이고 서기관들이라는 거예요.
달라서 말씀이 안 들린다는 거예요.
저는 오늘 정말 집에 있는 당자가
훨씬 힘든 죄인이라는 거이 얘기를
말씀드리고 싶은 거예요. 자, 돌아온
탕자, 집안의 탕자 모습을 다 가지고
있는 목자님의 나눔을 들려
드리겠어요. 이분은 제가 소개시킨
적이 있는데 학력고사 수석을 했다
그랬는데 이번에 나눔에 보니까 공부를
잘해서 매스컴을 탄 적이 있었지만 수석은
수석은
아니었답니다. 바로 잡겠어요. 공부
잘해서 샤프신 광고에 나온 적은
있대요. 행정이 최연소 합격이라고
했는데 그것도 일반 행정이 있고 교육
행정이 있고 이법 행정이 있는데
본인은 재경에 재경부처에서만 최연수
합격을 했다고 이걸 바로 잡았어요.
행정고시 전체 수 수 수석이 아니고
재경부처에서 최연소로 합격했다고 이거
커밍아 아웃 하느라고 굉장히 힘드셨을
것 같아요. 우리는 다 뭐 수석으로
알았는데 쥐아리도 최고 아리도 좀
알아봐야 되겠어요. 예. 자, 이렇게
당연히 서울대학을 갖고 대단한 사람의
나눔이에요. 아버지가 30년 동안
중소기업을 해오셨기 때문에 재산이
있으신데 아들에 대해서는 인색하셔서
어렸을 때부터 도움을 안 주셨다.
아들이 내가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 감옥을 가라고 하셨다. 아버지는
어릴 적부터 나에게 거짓말 쟁이와
엉터리라는 말을 많이 했다. 그러면서
여동생은 편해를 그렇게 하셨다. 어릴
적적 전에 한글도 못 읽고 발표하라면
울었다. 초등학교 때는 저를
특수학교에 보내라고 했고 컨닝하고
물건 훔치고 아버지한테 매일 맞았다.
아버지가 저한테 하신 말이
거짓말쟁이와 엉터리라는 말이에요.
압도적이었고. 여동생이 공부를 잘해서
서울대 가고 의사로서 장학금도
받았는데 나도 내가 못 한다는 생각을
안 했는데 항상 나보고는 엉터리고
운이 좋았다고 한다. 서울대를 가든
고시를 붙든 직장에서 무슨 일을 하든
엉터리다라는 말을 계속 들으면서
살았는데 드디어 이분이이 화려한
화려한 경력을 가지고 벤처 회사를
차려서 망했어요. 그래서 40억 빛을
졌습니다. 그래서 갑기 위해서
지하에서 라벨을 붙이면서 스타킹에
나갈 정도로 숙련된 라벨을 이렇게 잘
붙이세요. 그 지하에서몇 년을
붙였어요. 1인 경영이라고 책도
내셨습니다. 빚독척을 매일 수십 통씩
받으면서 지하 사무실 배수관에 끈을
묶어 놓고 몇 번이나 목을 매려고
하였다. 아버지만 생각하면 결혼을
해도 식은땀이 났고 횡종고시 합격을
했는데도 너는 떨어졌어야 했는데이
시험이 잘못된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기
기
사랑하던 동생이 비행기 추락으로
동생이 죽었는데 동생 앞에서 아버지는
술의 취에 네가 죽었어야 한다고
하셨다. 하나님을 믿어도 아버지한테
인정을 받고 싶은 피의식이 있다
보니까 그렇게 아내의 말투에서 그
아버지의 말투를 볼 때 아내는
피의식이 없기 때문에 그냥 그 어
광분을 아내의 눈빛에서 광분을 한다고
지금도 목자는데 피터지게 싸우느라고
매주 목을 못 나왔다고 이런 나오물
했어요. 제 마음에 이런 부려가 있다
보니 아버님의 구원보다 돌아가시면
진짜 떠오르는게 빚도 같고 고생끝
행복 시작이겠다
싶다고 아버지가 힘들게 말씀하시기를
절대 부조받지 말고 장례를 검소하게
하라. 그러나 나는 그동안 부조한게
얼만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이
양반은 내가 어떻게도 구원을 못 받을
거라는이 믿음이 굳세게 생겨서
목사님이 사부님을 위해 기도했을 때
구원을 위해 망하기를 기도했다고
하셨는데 나는 그런 기도가 안 나오고
온전히 재산이 남아 있기만을
기도한다. 지금은 빚이 거의 해결이
되었다. 재산도 증식이 되었다.
이것을 하나님이 주신 거라고 감사를
해야 하는데 나의 능력으로 벗어나고
열심으로 넘어갔다고 생각하는게 있다.
그런데 아버지가이 10몇년 동안
빚갚는 과정을 보시고 너처럼 운좋은
놈은 처음 봤다. 또
그러셨다는 그러니까 아버지를 생각하면
욱하고 올라오고 오늘 다 돌아가셔도
놀랍지가 않고 1년 뒤에 돌아가셔도
하나도 놀라지 않을 것 같아.
그러나 아버지가 예수님을 믿지 않고
돌아가시면 누구를 만나든 어떤
경우에도 영적 자존감, 자신감이 또
평생에 회복이 안 될 것
같다. 모든 것 갖춘이 집사님은
믿지도 않는 부모님과 죽은 동생에
대해서까지도 아직도 비교를 하고
피해식이 있어요. 참으로 돌아온
탕자이기도 하고 집에 있는 탕자의
모습이기도 이분 정말 음란과 이런
모든 것으로 돌아온 탕자이기도 했는데
여전히 와서 너무 잘라 가지고 또
집에 있는 탕자에 이런 모습이
있습니다. 음. 참으로이 아버지
굉장히 훌륭하지 않아요? 예. 근데
이분 정말 단칸방에서 그렇게 10몇
년을 사는데 그 아버지께 진짜 돈
있으면서 안
도와줬거든.이 아들을 살려냈다고
생각해. 정말 돈 좋으면 45억을
무슨 수로 나라님이라도 그걸 갚겠습니까?
갚겠습니까? 라벨
라벨
붙이면서 그 똑똑한 사람이 지하에서
이렇게 하다가 그쎄 빛을 지금
갚았다는 거 아니에요. 할렐루야.
놀렐루야. 예. 그 아버지는 예수도
없이 이러는데 우리는 예수 믿으면서도
어찌 그렇게 낮아지를 못하는
낮아지지를 못하는지. 그러나 그
아버지도 또 집에 있는 탕자가 돼서
믿기는 하늘의 별인 거 같아.
정말 그 아버지의 구원을 위해서
기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말씀
맺습니다. 여러분은 아버지를 잊고
지내는 중입니까? 아버지를 떠올리며
생각하는 중입니까? 아버지께 돌아오는
회복의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돌아온 탕자입니까? 집에
있는 탕자입니까?
둘 중에 누구를 고르시겠습니까?
정말 우리가 돌탕이나 집탕이나
이제 나 주를 멀리 떠났다. 이제
집으로 돌아오는 거. 예. 그거밖에
길이 없습니다. 다 주님 앞으로
돌아오시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찬송하고 기도하겠습니다.
말씀을 생각하며 함께 찬양하겠습니다.
나 주를 멀리
떠났다. 이제 옵니다.
옵니다. [음악]
[음악] 나
나 죄의
죄의 길에
시달려
주여 옵니다.
그 귀한 세월 보내고 그 귀한
귀한 세월
보내고
눈물로 주여 봅니다.
봅니다. [음악]
[음악]
내
[음악] 주여
주여 나를
나를 [음악]
[음악] 받으사
받으사 맞아
주소서나 나 죄 나 [음악]
[음악]
죄매할 이제 옵니다.
[음악]
사랑자 주여 봅니다.
봅니다. [음악]
[음악]
왔으니 [음악]
[음악] 내
내
주여 나를
나를 [음악]
[음악] 받으사
받으사
[음악]
더욱 간절히이 병든 마음을이
마음을이 병든
병든 마음을
마음을
고치 주님 이제 옵니다.
옵니다.
오직 주만 바라고 옵니다. 힘과
힘과 [음악]
[음악]
소망하고 주여 옵니다.
나 이제 나 이제 [박수]
[박수] [음악]
[음악]
왔으니 내
주여 주여
주여 나를
받으사 맞아
맞아
주소 바라의 분은 주님밖에 없습니다.
손을 높이들고
바랄 것이고
예수님만 바랍니다.
우리 주 예수 아버지의
아버지의 마음을
마음을 위해
위해 주님
강하신
아버지 나이 [박수]
왔으니 내 집을
찾아 주여
주여 [음악]
[음악] 나는
나는 맞아
주소서버지 집에 왔습니다. 니다. 나
모습대로 드립니다. 내
주여 주여
나를 맞아 주소서.
[음악]
우리에 빚을 갚아야 될 탕자도 있고
돈밖에 관심이 없어서 아버지도
팔아먹을 집안에 탕자마다들도
있습니다. 각각 탕자 같은 자녀,
마다들 같은 자녀, 탕자 같은 남편,
아내, 또 마다들 같은 아내, 남편,
부모, 형제 종료대로 장례대로
있습니다. 그 모든 곳에 객관화가
이루어지고 그들 모두의 구원이 구원의
초점이 있기를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아버지에 대한 오해와 그
결과로 인한 자신에 대한 오해와 또
그 결과로 인한 형제에 대한 오해를
다 이제 내려놓도록 아버지를 바로
알도록 내 자신을 바로 알도록 오늘은
특별히 모범생으로 일만하면서 사랑의
사랑으로 응답하지 못하고 구원의
기쁨이 없는이
똑똑하고 성실한 불쌍한 마다들을
위해서 말씀이 뚫고 들어가게 해달라고
다같이 기도하겠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지금 아버지를 떠난 분들이 있습니까?
그곳에서 비로소
공급하십니까? 지염 열매를 먹고자
하나 지염 열매도 먹을 수 없는 단계
있습니까? 그
단계에서 하늘과 아버지에게 죄를
지었다고 고백을 하고 계십니까?
그 회개의 고백만이이 사건에서 가장 확실한
확실한
해결책인데 아직도 회개가 안 나와서
내가 이렇게 된 것은 아버지 때문이고
부모님 때문이고 부모 형제 때문이고
사장 때문이고 가장 때문에 부장
때문이고 하면서 원망만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않습니까? [음악]
[음악]
참으로 회개를 함으로 모든 문제가
불식될 수 있도록이 가난을 수치로
여기지 않을 수 있는 그 당당함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특별히
집에 있는 당자마다들에 대해서 생각을 해
해
보았습니다. 착하나의 컴플렉스로
자존감이 없는 그는 날마다 눈치를
보며 실어를 못하며 참고도 참으며 피
의식 속에서 그렇게 생색을 하고
이렇게 분노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오늘이 말씀을 보면서 제가
제가
100% 집에 있는 마다들 탕자의
모습이 제게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이 이 땅에 이렇게
성경에서도 구원받지 못한 그 집에
있는 탕자인 저를
저를
주님의 만극하신
은혜로 구원하게
하셨사오니 아버지 하나님 제가 만
입이 있어도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아직도 그 모든 것에서 완전히 졸업을
못 했지만은 그러나 이렇게 아버지 하나님
하나님
죽을 수밖에 없는이 마다들을 구원해
주신 주님
오늘 여러분들 가운데 아직 드러나지
않는 정말
감추어진 정말 진짜가 아니고
복사본으로 살아가는 착한 아이
컴플렉스에 걸려 있는 모든 분들을
위해서 기도하오니
어떤 정말 돌아온 당자의 그런
윤리적인 죄보다도 내가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 가장 큰 죄이고 내가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지울 수밖에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이해하고 이제
말씀이 꿰뚫고 들어갈 수 있도록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정말로 나 이제 주께 돌아올 수
있도록 참으로
멀거먼 길을 돌아오지 말고
이제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생각을 하며 이렇게 주님께서
돌아오기를 원하시는 정말 이런 양기에
우리가 들어갈 수 있도록 주님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자, 집에 있는 다 주님께서 원하시고
부르시기를 원하는 당신의 자녀인 줄을
믿사오니 우리가 그 자녀의 자격에
합당한 사람으로 자리할 수 있는
우리가 될 수 있도록 주님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우리 부모님들을
위해서 기도하 참으로이 모든 식구들을
위해서 기도하며 한 사람도 나 되지
아니하고 주님의 부르심에 아버지
하나님 초청을 받을 수 있는 진정한
의인이 될 수 있도록 주님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참으로 이렇게
우리가 달라질 때에 교회가 달라지고
사회가 달라지고 나라가 달라질 줄을
믿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 개인
구원이 사회 구원이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Click on any text or timestamp to jump to that moment in the video
Share:
Most transcripts ready in under 5 seconds
One-Click Copy125+ LanguagesSearch ContentJump to Timestamps
Paste YouTube URL
Enter any YouTube video link to get the full transcript
Transcript Extraction Form
Most transcripts ready in under 5 seconds
Get Our Chrome Extension
Get transcripts instantly without leaving YouTube. Install our Chrome extension for one-click access to any video's transcript directly on the watch page.
Works with YouTube, Coursera, Udemy and more educational platforms
Get Instant Transcripts: Just Edit the Domain in Your Address Bar!
YouTube
←
→
↻
https://www.youtube.com/watch?v=UF8uR6Z6KLc
YoutubeToText
←
→
↻
https://youtubetotext.net/watch?v=UF8uR6Z6KLc